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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나의 오컬트한 일상>

선곡한 음악
게스트
with 구구 들불 대표
에피소드 업로드일
2022/04/12
박현주 <나의 오컬트한 일상>(2017, 엘릭시르, 전 2권)
진행. ㅎㅇ 10일에 한 번씩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를 보내고, 격주로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에서 말한다. ㅡ 초대손님. 구구 여성과 책을 잇고, 책과 활동을 연결하는 여성 독서 커뮤니티 들불의 운영자다.
ㅎㅇ 지난 에피소드에서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다뤘는데요. 저희 코너에서 다루는 첫 구간이었어요. '그동안 왜 반드시 신간 소설 이야기만 하려고 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스스로 들더라고요. 숨겨진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발굴하는 재미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오늘 함께 읽을 책은 5년 전에 출간된 박현주 소설 《나의 오컬트한 일상》(2017, 엘릭시르, 총 2권) 입니다. 박현주 작가는 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에세이도 쓰고, 소설도 쓰고, 장르 비평도 합니다. 구구님은 박현주라는 이름을 언제 어디서 처음 알게 되셨나요? 구구 제가 도로시 세이어즈라는 작가를 엄청 좋아하는데요. 도로시가 쓴 탐정물 '피터 윔지 경 시리즈'의 첫 책이 《시체는 누구?》(2008, 시공사)에요. 그 책을 박현주 번역가가 작업했고요. 저는 그때 처음 인지하게 됐죠. ㅎㅇ '시체는 누구'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구구 네, 맞습니다. 이 책이 진짜 재미있거든요. 그런데 외국 작가가 쓴 책이 재미있게 읽힌다는 건, 사실 번역가의 역량 덕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런 책을 만났을 때 번역가의 이름을 무조건 기억해둬요. 그 역자가 번역한 작품을 따라 읽는 게 되는 거죠. 그렇게 읽게 된 책이 마가릿 밀러의 가정 스릴러물 《엿듣는 벽》(2015, 엘릭시르)이에요. 이 책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ㅎㅇ 저는 박현주라는 이름을 에세이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2020, 라이킷)로 처음 접하게 됐어요. 원래 운전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 40대가 되어서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된 걸 계기로 쓴 에세이예요. 운전과 관련된 키워드를 거의 서른가지 정도 뽑은 후 자신의 삶과 연결 지어 쓴 글인데요. 각각의 꼭지에 거의 다섯가지의 서로 다른 콘텐츠가 언급되어 있어요. 그렇게 엮어내는 방식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요. 박학다식함. 좋잖아요. 그래서 읽자마자 사랑에 빠졌는데, 아직도 저는 면허를 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책이 너무 좋아서 약간 흔들릴 뻔했어요. 이 참에 운전을 해볼까 하고요. 구구 그 박학다식함이라는 포인트는 저도 《시체는 누구?》를 읽을 때 느꼈던 부분이에요. 피터 윔지 경이 셰익스피어의 말을 비롯해서 인용을 정말 많이 하거든요. 읽는 입장에서 인용구에 대한 해석이 필요해질 때가 오는데 그런 것까지 다 번역되어 있더라고요. ㅎㅇ 오늘 이야기할 소설에도 중간중간 인용구가 많죠. 그런 점에서는, 두 권 구성인 소설인데 두 권만 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좀 더 포만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해요. 구구 이 책이 연작소설이라서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하고 있는 이야기가 다른데요. 큰 줄기는 주인공 '도재인'이 오컬트 소재로 글 쓰는 일을 의뢰받게 되면서 취재 현장에 가고, 그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ㅎㅇ 주인공의 직업이 번역가이면서 프리랜서 작가라고 나와 있어요. 실제로 그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는 박현주 작가가 투영된 캐릭터인 듯 싶어 흥미롭게 느껴지는 대목이었어요. 프롤로그를 보면, 재인이 다리를 다쳐서 집에서 쉬던 중에 새로운 일감을 받게 되어요. 33쪽부터 35쪽에 걸쳐, 주인공이 어떻게 일을 의뢰 받게 되는지 상세한 내용이 담긴 제안 메일 전문을 보면서 저는 정말 무릎을 쳤습니다. 이거 완전 실용서예요. 어떻게 쓰여 있는지 그대로 따라가 볼게요. (소설 속 메일 본문의 문장에는 볼드 표기를 하겠습니다.) 보내는 사람. 고민서 받는 사람. 도재인 "안녕하세요. 《오씨 매거진》 피처 에디터 고민서입니다." 인사 후, 고민서 씨는 누구로부터 재인의 연락처를 소개받았는지까지 밝히고서 매체 소개를 합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의 라이프 스타일, 패션과 뷰티를 다루는 저희 《오씨 매거진》은 지금 창간 준비 중인 잡지입니다." 너무 무서운 말이죠. 창간 준비 중. 이건 '제안을 하는 당신에게 지금 가시적으로 보여줄 건 없어, 콘셉트는 있어, 근데 구체적이진 않아, 같이 만들어 가자'라는 뜻일 텐데요. 처음부터 기획의 폭을 많이 열어두는 것이니, 일을 받는 입장에서 어떤 분들은 좋아하실 수 있겠지만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저에게 있어) 창간 준비 중인 잡지란 좀 무서운 대상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예전에 기고한 어떤 글을 재밌게 읽었고, 이런저런 부분이 재밌었다고 콕 집어서 말해줘요. 그러면서 "저희 잡지에 딱 맞는 필자라고 생각을 했어요."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 후, 요청하려는 일에 대한 상세 내용이 이어집니다. 의뢰해 주시는 고민서 씨가 그래도 꽤 솔직하게 메일을 쓰셨어요. 여성의 라이프 스타일과 패션과 뷰티를 다루는 매거진인데, 다만 사장님이 오컬트적 요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런데 "저희는 정확히 어떤 기사를 실어야 될지 알 수 없더라고요."라면서 그래서 당신에게 의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죠. 그러면서, 생활에 밀접한 오컬트를 소개해 주는 내용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해요. 이렇게 상대에게 고민하고 있는 걸 솔직하게 공유 해주는 건 고마운 일 같아요. 이 일을 제안하는 다른 후보 리스트가 없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이건 딱 재인을 위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아쉬운 것은 이 메일을 마무리할 때 기사의 분량, 주기는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형식이나 취재비 등은 전화로 의논 드리면 어떨런지요?"라고 하는 부분이에요. 섭외 비용도 쓰여 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구구 그 부분이 정말 아쉬웠죠. 뭐든 다 문서화되어 있으면 좋으니까요. ㅎㅇ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과 이 일을 하고 싶은지, 이 일을 의뢰하는 우리는 누구인지를 정말 잘 밝혀준 메일이어서 읽는 쾌감이 있었습니다. 이런 메일을 쓰려면 물론 품이 많이 들겠지만, 기본을 지키지 않는 메일이 많잖아요. 구구 저는 최근에 메일 분량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요. 필요한 내용은 다 들어가되 길면 안 된다고 생각 하는데, 이 메일은 분량도 인상 깊었거든요. 적당하다고 느껴졌고, 구어체로 쓰여 있어서 잘 읽히기도 했고요. ㅎㅇ 이렇게 잘 쓰인 메일 뒷부분에 P.S.가 달려 있어요.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죠? 구구 "물고기 자리시라고요? 저희 발행인께서는 전갈 자리라서 서로 잘 맞을 것 같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나중에 생시까지 알려주시면 사주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라면서 오컬트 일 의뢰임을 잊지 않게 하는 장치를 달아두죠. ㅎㅇ 정말 위트 있는 P.S. 인 것 같아요. 이 메일을 받고 나서 재인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바로 나오는데요. "오컬트를 지향하는 잡지라니 흥미로우면서도 수상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격월에 한 번 취재 기사를 써도 된다니 내게는 꽤 편리한 조건이었다."(p.35-36)이라는 거예요. 일단 지금 재인이 다리를 다친 데다가, 뭐든 월간보다는 격월간이 낫고, 주간보다는 월간이 나은 법이니까요. 구구 텀은 길수록 좋죠. ㅎㅇ 만약에 오씨매거진이 월간지였으면 꼭지가 12개가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럼 소설도 6장 구성이 아니고 12장 구성이 됐을지도 모르고요. 여러모로 좋은 주기였습니다. 구구 여러 가지 설정이 다 합리적이었던 것 같아요. ㅎㅇ 제안 메일 파트가 사실 전체 소설의 전개와는 별도의 요소이긴 한데, 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첫 상이 메일인 경우가 많잖아요. 물론 첫인상을 전화로 전하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지만요. 최대한 상세하고 성의가 있는 메일을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누군가에게 제안을 할 일이 있을 때 그렇게 하려고 하고요. 구구 그런데 전 잘 쓰인 메일을 만나본 적이 몇 번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은 고도로 잘 쓴 메일을 한 번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뭔가 읽는 순간 '전율이 일 정도의 엄청난 메일이다!' 같은 느낌을 받는 그런 메일을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네요. ㅎㅇ 들불에 제안을 주십시오. 여러분…. 전율이 이는 메일로….